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프레드 노벨 (문단 편집) == 가족관계 == 노벨의 가족들은 모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 임마누엘 노벨 : 알프레드 노벨의 아버지. 과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건축학교 졸업 후 평생 사업가/발명가의 길을 걸었다. 초기에는 사업 성공을 거두면서 꽤 잘나갔고 유명해졌지만, 공장이 화재로 인해 완전히 전소되고 말았다.[* 당시 그의 아내가 3남 알프레드를 임신중이었다.] 하필 그 당시 임마누엘은 사업을 한창 확장하고 있어 이곳저곳에서 빌린 부채가 매우 많았기 때문에 그 피해는 더욱 컸다. 빚을 갚기 위해 온 가족들이 동분서주하던 중에, 러시아 시장의 미래를 보고 그곳으로 진출하기로 마음먹는다. 러시아로 건너가 무기제조/납품 사업을 하며 당시 러시아 황제인 니콜라이 1세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크림 전쟁 당시 러시아군의 선전에 크게 기여한다. 사실 임마누엘은 이전의 트라우마도 있기도 하고 전쟁이 끝날 경우를 생각하여 사업 확장에 있어서 매우 소극적이었으나, 러시아 정부가 부채변제 보증서까지 써주면서 공장 확충을 강권하였다. 그러나 니콜라이 1세가 죽고 알렉산드르 2세가 다음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전쟁을 종전하면서 보증서를 무효화시키고 만다. 결국 임마누엘은 다시 빚더미에 앉게 되었으며 러시아에서의 모든 사업에 손을 떼고 스웨덴으로 귀국했다. 이후 아들들과 함께 니트로글리세린 연구에 몰두하다가 공장 폭발 사고로 막내아들 에밀을 잃고 그 충격으로 몸져 누웠으며 화약과 관련된 일에 완전히 손을 뗐다. 하지만 3남 알프레드가 화약을 계속 연구하는 것에서는 반대하지 않았다고 하며, 과학에 대한 열정은 그대로여서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합판 개선 연구에 몰두하며 남은 여생을 보냈다. * 로베르트 노벨 : 임마누엘 노벨의 첫번째 아들이자, 알프레드 노벨의 큰형. 상기 설명되었듯이 집안의 장자로써 어려운 집안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돈을 벌러 이곳저곳 다니는 등 상당히 고생하며 성장했다. 나중에 회고하기를 “언젠가 하루종일 일하며 번 돈을 퇴근길 어디에선가 잃어버렸다. 집에서 배고파 울고 있을 동생들을 생각하니 기가 막혔었다.” 라고 회고했을 정도. 나중에도 아버지가 러시아를 떠날 쯤에 로베르트는 루드비히, 알프레드와 함께 러시아에 남아 셋방살이를 전전하면서 여러 사업을 하면서 벌어들인 돈으로 가족의 빚을 갚느라 고생한다. 동생 루드비히와 함께 석유사업에 참가했고, 램프 등유와 조명 제작에 관심이 많아 관련 제품을 발명했으며 그 외 이런저런 제품을 발명하는 등 아버지처럼 평생을 사업가이자 발명가로써 살았다. * 루드비히 노벨 : 임마누엘 노벨의 두번째 아들이자, 알프레드 노벨의 작은형. 큰형인 로베르트와 마찬가지로 과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러시아에 머무를 때는 석유 사업에 뛰어들어 큰 돈을 벌면서 “북유럽의 록펠러” 라는 별칭도 붙었다고 한다. 그 외에 세계 최초로 유조선을 만들었으며, 석유를 공급하는 송유관 개선에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그가 죽었을 때 신문에서는 “죽음의 상인 알프레드 노벨이 죽었다” 라고 오보가 뜨기도 했으며, 알프레드는 큰 충격을 받아 자신의 이미지 변신을 위해 노벨상을 구상했다고도 전해진다. * 에밀 노벨 : 임마누엘 노벨의 막내아들이자, 알프레드 노벨의 유일한 동생. 형제들 중 유일하게 러시아에서 태어났다. 그 역시 과학에 관심이 많아 고등학생 때부터 아버지 공장을 들락날락거리며 공장 내 제품을 꼼꼼이 훝어보고 연구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셋째 형 알프레드와 같이 니트로글리세린 연구에 직접적으로 개입했다. 그러나 화약공장 폭발 사고에 휘말리면서 목숨을 잃었다. 노벨의 형제들 중에서 가장 일찍, 가장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비운의 인물. 그때 향년 21세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